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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이음새 학습튜터링 <북스타그램> 연작 칼럼 ① : 이승우 작, 『사랑이 한 일』

Hit : 1204  2021.05.01

금강이음새 학습튜터링 <북스타그램>에 내가 세 번째로 소개한 책은 이승우 작가의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이라는 연작 소설이다. 나는 물론 이 책을 매우 인상 깊게 읽었지만, 이 책은 소개하기에 어려운 형태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고심했다. 어떻게 해야 이 책의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 책의 한 문단을 포착해서, 그 문단의 핵심 키워드를 인용해 새로운 글을 써보는 것이었다.


금강이음새 학습튜터링 <북스타그램> 연작 칼럼 ① : 이승우 작, 『사랑이 한 일』



금강이음새 학습튜터링 <북스타그램>에 내가 세 번째로 소개한 책은 이승우 작가의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이라는 연작 소설이다. 나는 물론 이 책을 매우 인상 깊게 읽었지만, 이 책은 소개하기에 어려운 형태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고심했다. 어떻게 해야 이 책의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 책의 한 문단을 포착해서, 그 문단의 핵심 키워드를 인용해 새로운 글을 써보는 것이었다.


이 책은 「창세기」를 모티브로 이어간 연작 소설이다. 작가는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일화를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썼다. 바칠 것을 요구하는 신도, 그 요구에 순종하는 아버지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이것은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텍스트로 엮어진 이해다. 한 명의 인간, 동시에 위대한 소설가가 펼쳐 놓은 이해를,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사랑의 길은 일방통행으로 흐른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퍼부어도 “왜?”라는 질문을 받는다. 반대로 “날 왜 사랑해”라는 질문을 아무리 퍼부어도 “그냥”이라는 말을 듣는다. 우리의 모든 사랑은, 태생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소통의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말이 잘 통한다”라는 이유는 적잖은 거짓이다. 사람은 말을 통해 생각을 전한다. 생각은 말을 통해 생겨난다. 다시, 생겨난 생각을 담고 말은 떠난다. 그 말을 듣고 또 다른 생각이 피어난다. 무수히 많은 생각은, 다만 비슷해 보일 뿐, 단 하나의 모양새도 똑같이 생기지 않았다. 구조적으로 “말이 잘 통한다”라는 이유는 성립할 수가 없다. 우리는 크고 작은 소통의 답답함에 시달리며 살아가야만 한다.


“말이 잘 통한다”는 이유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오직 둘만의 우주가 탄생하는 새벽녘의 시간. 감정의 온도가 모닥불보다 따스해질 때의 말은 다르다. 그것은 그럴 리 없을 것이라 여겼던 말의 모양새를 비슷해 보이게끔 우리를 현혹한다. 누구에게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노라, 다시는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 마법의 시간은 사기와도 같이 우리의 눈을 속인다.


“말이 잘 통한다”가 유효한 시간은 필연적으로 만료될 수밖에 없다. 둘만의 우주가 탄생하던 시간은 점차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그 반대의 틈새로 솟아오른 자그마한 미혹의 점이 넘실거리는 사랑의 바다를 오염시킨다. 오염된 한 줌의 점이 생각에 실린다. ‘왜 그렇게 말을 했을까?’ 납득은 되지 않으나 납득 해야만 한다. “말이 잘 통한다”라는 말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단 한 줌의 의혹도 사라지지 않으면, 자그마한 물구멍에 터지는 댐처럼, 잘 통하던 말의 모양새가 와르르 무너진다.


“말이 잘 통한다”는 말은 그때부터 명제가 아니라 선언이 된다. 참과 거짓을 논해야 하는 영역에서 멀어진다.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가 우리의 존재를 휘감는다. 어떻게든 통하게 만들어야 하는 사명을 띠게 된다.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 위기의 순간, 우리는 광야로 나가 기쁘게 고독을 마주한다. 잘 통하는 것이 얼마나 안락한 것이었는가. 떠나온 그곳은 여기에 비해 얼마나 행복한 곳이었던가. 행인은 떠나가던 말을 다시 품고 집으로 돌아온다.


“말이 잘 통한다”라는 말은 기어코 끊어질 듯 희미한 숨을 내쉰다. 아무런 의미 없이 던진 말로도 행복한 웃음을 짓던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던 그. 말의 생산 없이 껴안듯 감싼 팔베개로 모든 것을 읽어내던 그는 희미하다. 아무런 의미 없이 던진 말은 시간의 틈새로 사라져 버린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말에는 갸우뚱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요새처럼 단단한 팔베개를 만든 손은 슬쩍 빠져나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잘 통하던 말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티 없이 맑았던 사랑의 바다는 어느새 이토록 검게 물들었는가. 행인은 공황에 빠진다.


작가는 말한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이다, 라고 아버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거나 없었던 일이 있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크게 말하는 방법이 되는 말이 있다. 사랑의 말이 그렇다. 무엇보다 사랑은 잘 말해져야 한다. 예컨대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해져야 한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사랑 때문에 시작되었고 사랑 때문에 이루어졌다. 나는 장작 위에 누웠고, 아버지는 칼을 들었고, 신은 놀라서 소리쳤다.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 바치라는 명령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대체되었다.





말해진 사랑은 그 자체로 존재를 엮는다. 말해지지 않는 사랑은 존재를 광야에 나서게 한다. 엮일 것인가, 나툴 것인가. 말해지지 않는 사랑에 가슴 아파하던 그가 무색하게, 말해진 사랑이 채워놓은 족쇄에 고통스러워한다. 족쇄에서 해방하여 자유로울 것인가, 훈장처럼 족쇄의 무게를 짊어질 것인가. 숙명처럼 지어진 숙제에서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도망칠 수 없다.


이해는 다시 불가해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사랑은 그래서 무한한 힘을 머금었다. 이 고통스러운 무게를 짊어지게 할 만큼,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완성하고자 할 만큼, 불가해한 영역의 힘으로 사랑은 삶을 움직이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이 책의 한 챕터다. 사랑을 다루는, 또 성경을 다루는 소설이라지만, 문장은 매우 정밀하고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잠깐 정신을 파뜨리면, 문단 전체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이다.


아브라함이 너무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바치려 한 이유는 다른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다는 것은 잔인하거나 위대하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둘 다였다. 사랑하는 감정을 아는 모든 자들은 아브라함의 범상치 않은 행위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었음은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랑을 해야 하는가. 결코 통과할 수 없을 듯한, 그러나 도망칠 수도 없는, 시험 같은 사랑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모든 선택의 순간들을 이해하고, 그 이후의 모든 결과물 또한 다른 사랑의 형태가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소설은 펼쳐 보인다. 다른 사랑의 형태가 만들어 낸 삶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소설은 카메라를 옮긴다.


내가 주목한 관점은 뜨겁게 타올랐다가 차갑게 식어가는 사랑의 과정과, 사랑을 약속했던 말들이 갖는 무게였다. 아브라함과 외아들 이삭의 에피소드는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명령’에서 비롯된다. 아버지의 입장, 아들의 입장, 양자의 입장이 충돌할 때 벌어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갈등의 순간을 우리의 관계에 대입해서 생각해보았다.


대체적으로 팀원들 모두 아브라함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아마 그것이 당연할 것이다. 인륜지대사에 거부하라고 속삭이는 ‘사랑의 명령’이라니, 아무래도 납득하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자신을 속이고 사랑해본 적이 과연 없었을까? 그 고뇌에서 허우적거리던 순간은 과연 없었을까?


모를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늘 자신을 속이며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금강웹진] 박영서 sangmo2004@gg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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