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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법을 주무르는 ‘보이지 않는 손’

Hit : 1443  2019.05.01

현재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몇몇 연예인의 몰카와 클럽 내 성폭력 의혹, 전 법무부 차관의 성폭행 및 강제 마약 투여 의혹, 그리고 언론사 사주 등이 얽힌 연예인 성 상납 문제가 그것이다. 우리는 세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세 사건은 지난 2008년부터 현재인 2019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라지지 않은 우리 사회의 병폐를 관통하고 있다. 무엇보다 앞서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관계를 비판하고 성찰하는 젠더 담론을 통한 이야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젠더 담론에서 멈출 수 없는 까닭은, 세 사건 모두 젠더 권력적 문제에 정치 권력적 문제가 복합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법을 주무르는 ‘보이지 않는 손’




박영서(불교문화학부, 19)

현재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몇몇 연예인의 몰카와 클럽 내 성폭력 의혹, 전 법무부 차관의 성폭행 및 강제 마약 투여 의혹, 그리고 언론사 사주 등이 얽힌 연예인 성 상납 문제가 그것이다. 우리는 세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세 사건은 지난 2008년부터 현재인 2019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라지지 않은 우리 사회의 병폐를 관통하고 있다. 무엇보다 앞서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관계를 비판하고 성찰하는 젠더 담론을 통한 이야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젠더 담론에서 멈출 수 없는 까닭은, 세 사건 모두 젠더 권력적 문제에 정치 권력적 문제가 복합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언급되고 있는 가해자, 혹 혐의를 받는 자들을 뉴스에서는 ‘유력 인사’라고 소개한다. 연예계를 주름잡는 인물, 한때 대한민국 검찰의 미래라고 불렀던 인물, 현재도 메이저 언론의 사주이며 동시에 대한민국의 여론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 여기에 관계된 자들까지 모두 평소에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며 어떤 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으로, 어떤 이들에겐 성공의 목표로 여겨지고 있던 자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욕망하는 인간의 마음은 역사의 방향성을 추동하는 힘이 되어왔다. 때론 한 개인의 욕망이, 때론 시대정신이 만든 집단적 욕망이 개인의 삶과 사회적 양상을 변화하게 하였다. 물론, 그 변화가 진보인가, 퇴보인가는 항상 신중히 따져봐야 한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말속에는 그 모든 효과가 감춰져 있다.

성공을 공인받기 위해선 엄격하고 비교적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잣대가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 잣대로서 부와 명예를 모두 이용하여 판단하게 된다. 그 판단 준거를 현재에 적용하면, 지금 특정 위치에서 특정한 영향력을 가진 특정 인물로 좁혀진다. 그래서 우리는 ‘제2의 누군가’라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당사자의 동의 없이 쉽게 부여하고 사용한다. 우리 안에는 ‘제2의 누군가’가 되고 싶은 내재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공동의 노력 끝에 민주화를 이루었으나, 세 사건에서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는 변화한 제도와 성숙해진 시민의식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피해자는 목숨을 걸고 폭로하고, 혹은 목숨을 버려가며 폭로하지만, 수사기관은 축소 은폐를 위해 노력하고 사건에 관심 두는 정의로운 이를 탄압한다. 언론은 핵심 인물을 위해 이슈 몰이로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혐의를 받던 이들은 아무런 법적 처벌 없이 사건은 점차 잊혀 간다. ‘별장 성폭행 사건’과 ‘언론사 사주 성 상납 사건’은 확실하고 강력한 물증이 있음에도 처벌받지 않은 채 공소시효가 만료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섬뜩함 마저 느껴진다. 

이 모든 사건은 ‘법 앞에서의 평등’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아온 우리의 눈앞에서 생생히 벌어지고 있다. ‘법 앞의 평등’에 대한 개념은 인류 문명의 태동과 함께해 온 아주 고전적인 개념이다. 최초의 성문법전 중 하나인 <함무라비 법전>에선 사회적 약자에게 더 관대하고 강자에겐 더 엄격한 합리적 평등에 기반을 둔 법치를 제시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신 앞에서의 평등’을 정의의 기본 이념으로 제시했고,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적 변화를 거치며 초 법률적 평등이 법적 평등을 우선하는 시대로까지 나아간다. 이른바, ‘천부인권’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우리가 ‘법 앞에서의 평등’을 이뤄야 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개인은 날 때부터 국가와 맺은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가 엄격한 평등정신에 입각한 법치주의를 지켜나가기를 요구할 당연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때때로 현실 사회에서는 자본의 이익이 법적 개념을 압도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그 결과 공통의 인식 속에서 법적 처벌의 기준이 명시된 것과는 다르게 구성됐다. 법적 처벌에 있어 그 근거는 행위 유무가 가장 중요하지만, 수사기관의 갈지자 행보에서 ‘걸린 자’와 ‘걸리지 않은 자’로 나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사회적 영향력이 얹히면, 걸렸음에도 ‘처벌받은 자’와 ‘처벌받지 않은 자’로 나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유력 인사를 정의하는 또 다른 기준 속에 ‘행위가 있었음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는 자’가 통시적으로 묵인됐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절대다수의 정의로운 판결과 극히 소수의 특권적 판결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후자가 모든 국민에게 암시할 효과에 대해선 간과할 수 없다. 정의와 부정의는 혼탁해지고, 부정의가 때로는 정의로 인정받는 것이 암암리에 용인되는 것이다. 국가는 하나의 거대하고 복잡한 시스템이고, 시스템은 오직 법에 따라 운영된다. 그 어떤 가치보다 우뚝 바로 서야 할 법이 특정 개인, 혹은 집단에 의해 마구 움직인다면 그 국가의 존립은 본질적으로 흔들리는 것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단순한 논리적 귀결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구체화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성공을 향한 내재적 욕망 안에는, ‘처벌받지 않을 수 있는 자’라는 부수적 효과까지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 정의로운 자가 탄압받고, 옳은 말 하는 사람이 쫓겨나는 관습적인 조직문화까지 고려해보면 그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 성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 보이기도 한다. 수십 년간 지속하여온, ‘사소한 판결’ 하나둘이 쌓이고 쌓여, 이제 정의로운 법치와 법 앞에서의 평등을 당당히 주장하기엔 어색함과 괴리감과 위화감이 만연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언제나 난제였다. 법심리학에선 크게 세 가지로 정의(正義)를 정의(定意)한다. 경제적 측면에서 접근한 분배적 정의, 의사 결정의 측면에서 접근한 절차적 정의, 그리고 사회적 질서 유지 측면에서 응보적 정의가 그것이다.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는 암울했던 시대 상황에 기인한 ‘왜곡된 응보적 정의가 만연 사회’라 정의할 수 있다. 응보적 정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기 위해 법을 공부하고, 위법하지 않게 공격하는 법을 배우며, 자발적인 책임감 보다 힘의 지배 논리만을 믿게 된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본질적인 응보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당면하고도 시급한 문제이다. 법은 법 자체로 완전무결할 수는 없지만, 평등한 집행의 가치만큼은 지켜내야 한다. 최근 사건들에 대한 투명한 수사와 공정한 처벌은 이제 막중하고도 시급한 시대적 과제라고까지 할 수 있다. 단순한 법적 처벌을 넘어, 사회적 성공에 뒤따르는 막중한 도덕적 책무까지 절감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스텝이다. 시스템이 흔들리고 위태로울 때는 시스템의 가장 기본적 약속과 가치를 다시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수십 년간 왜곡되어 쓰여왔던 ‘정의 교과서’를 다시 쓸 기회를, 그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간 미심쩍은 사건들의 공소시효처럼 기억 저편으로 날려 보내지 않길 희망한다.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정의, 그런 달달한 것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증명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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