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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폭력

Hit : 1479  2018.12.01

폭력은 오늘날에도 크게 대두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이며 그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사이버 폭력,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크게 봤을 때 전쟁, 테러 등으로 확장 시킬 수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폭력

 

장 윤 성(응용불교학과, 15)

 

폭력은 오늘날에도 크게 대두되고 있는 사회적 문제이며 그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 사이버 폭력, 등으로 불리고 있으며 크게 봤을 때 전쟁, 테러 등으로 확장 시킬 수 있다.

먼저 폭력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국가와 개인의 신념과 종교적 신념으로 인한 테러가 존재한다. 안중근 의사의 도시락 폭탄, 오스트리아 황제 저격 사건, 911테러, IS의 테러 등이 존재하는데 일본과 오스트리아 같은 국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테러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국과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더욱 큰 인명피해 즉 더 큰 전쟁과 국민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숭고한 행위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들을 윤리적인 상황으로 보자면 누가 맞다 틀렸다라고 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두 가지 태도는 동시에 정당하기도 하고 또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단이 목적과 부합하지 않을 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고 하면서 폭력의 행사를 옹호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이한 논법이다. 반면에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모든 차원에서 폭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 속에서 목적이 결코 수단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고만 되풀이하는 것은 실효 없는 소박한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의 경우, 비폭력 투쟁의 동안 거의 백만에 가까운 희생자가 생겼다고 한다. 만일 폭력에 저항하는 적극적인 저항수단을 썼다면 그 희생자가 많이 줄었으리라고 상정해보는 것 또한 여전히 가능한 일이다. 이때에는 적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적이 잔혹한 살해 행위를 무한정으로 계속하게 방임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공범자가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지난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이나 프랑스인들이 나치에 감행한 폭력적이며 때로는 테러 리스트적인 저항 운동이 정당하다고 판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반적인 폭력의 종류는 다양하며 폭력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면서 윤리적인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점은 불교의 시선으로 폭력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인데, 불교라는 범주 안에 폭력 등의 윤리적인 문제를 담고 있는 항목이 따로 있지는 않다. 불교는 세간에서 벗어나 깨달음이라는 출세간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세간을 완전히 등지는 것은 아니며, 출세간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세간을 버릴 수 없음을 말한다. 또한 불교라고 하여 세속적인 부분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생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기에 세속에 대해 불교 나름의 윤리적인 입장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불교에서 온갖 행위는 마음에서 드러난 것임을 말한다. 깨닫지 못한 중생은 무명에 가려져 있으며 자기 자신만을 부여잡는 아집으로 살아가는 존재를 말한다. 이 점에서, 폭력은 내적인 갈등의 표출이며 자신의 아집, 아상으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폭력뿐만 아니라 싸움, 전쟁 역시 개개인의 아집 갈등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폭력 행위 그 자체보다 내면에 있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수행의 측면에서도 아집, 아상을 소멸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폭력은 아집의 발현이기에 수행자에게 있어서 마땅히 금지 시 되어야 할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살생은 폭력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데, 계율에는 불살생이 명시되어 있으며 이는 수행에 방해되는 불선 한 것으로 여겨진다. 살생이란 낙태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깨달을 기회를 앗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릇된 행이라 할 수 있다. 폭력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에 해를 가한다는 점에 있어서 살생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서 폭력 역시 불선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을 자신처럼 여겨 이롭게 하고자 하는 자리이타의 사상을 핵심으로 여긴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근본 취지에 따르면 폭력이란 상대방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므로 금지 시 되어야 할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집으로 일어난 폭력은 자비와는 상충하는 것이며 자리이타의 이념과도 부합하지 않기에 대승의 행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폭력행위 그 자체에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것, 그릇된 것이라는 관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고정된 자성으로서의 실체를 부정하듯, 어느 언어로 고정된 무언가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언어로써 이야기되는 것은 가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폭력 역시 이와 같은 것이며 폭력이라고 여겨지는 행위는 상황에 따라 방편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해 초 언어적인 방편을 활용하는 선사들의 경우 가차 없이 제자들을 몽둥이로 때리는 장면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일반적인 세속의 관념을 뛰어넘은 방편을 활용하여 제자들을 한순간에 망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제도행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선사와 같이 깨달은 이에게 있어서 폭력행은 단지 세간에 머무는 행이 아닌 출세간의 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이분법적 분별이 소멸하고 중생을 위하는 이타심으로 무장된 자에게 있어서 폭력이라고 여겨지는 행위는 중생을 위한 제도행의 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폭력이란 행위만을 놓고 옳고 그름의 관념을 고정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중요한 점은 불교는 단순히 선한 것을 장려하고 악한 행동을 그만두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세속의 측면에 맞는 선, 악 개념을 중심으로 말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은 수행에 도움이 되는 요소를, 불선이란 수행에 장애 되는 요소들을 일컫는다. 그렇게 불교는 궁극적으로 번뇌를 없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물론 계율과 같이 승단 유지 혹은 수행자의 수행에 흐름을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기시되는 항목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본래부터 그러한 것들이 해서는 안 될 것들로 규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출세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세간적인 이분법적 틀마저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폭력이란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아집을 녹일 수 있는 자비 정신을 함양시키는 데에 있어서 해서는 안 될 행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을 절대적으로 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기는 것 역시 분별이다. 이러한 분별의 틀에서조차도 벗어날 수 있어야 열반의 길로 향할 수 있는 것이며 분별이 제거된 상태에서의 행위는, 그것이 폭력으로 보이는 행위일지언정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 행위는 마땅히 타인을 위한 제도행인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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