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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파 분열의 원인 중 하나인 계율에 대한 나의 견해
부파분열의 원인 중 하나로 계율 해석에 대한 이견이 지목되고 있다. 계율(戒律)이란 붓다에 의해서 제도화된 승단의 구성과 운영에 관련된 규칙이다. 계율은 기후와 문화배경의 차이로 인해서 오늘날에는 승단의 생활원칙이 아닌 수행적인 청정행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부파 분열의 원인 중 하나인
계율에 대한 나의 견해
권지훈(응용불교학과, 18)
부파분열의 원인 중 하나로 계율 해석에 대한 이견이 지목되고 있다. 계율(戒律)이란 붓다에 의해서 제도화된 승단의 구성과 운영에 관련된 규칙이다. 계율은 기후와 문화배경의 차이로 인해서 오늘날에는 승단의 생활원칙이 아닌 수행적인 청정행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인도 불교사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부처님 당시의 계율을 그대로 지켜야 하는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입장의 견해로부터 부파분열이 시작되었다. 나는 불교의 근본을 잊지 않는 선에서 계율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 빗대어 왜 계율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나의 견해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일미화합(一味和合)을 유지하던 불교교단이 처음 분열한 것은 붓다의 입멸 후 100여년 경의 일이라고 전해진다. 10사(事) 혹은 5사를 둘러싼 논쟁으로 말미암아 교단은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 와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의 두 파로 분열하였다. 이 사건을 일반적으로 근본분열이라 부른다. 이어 이 두 파는 각각 재분열을 거듭하며, 불멸 후 300~400년 무렵까지 18 내지 20개로 분파해간다. 불멸 후 100년경부터 그 후 200~300여년에 걸쳐 불교교단이 복수의 집단으로 분열해 간 이 시기 및 이 시기에 발생한 복수의 각 집단을 부파(剖破)불교시대라고 일컫는다.
불교란 궁극적 삶에 도달하는 즉, 열반에 들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궁극적인 삶의 경지에 도달하는 길은 스스로의 직접적인 수행에 의한 것이라 한다. 상좌부 불교는 기독교나 힌두교처럼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궁극적인 삶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수행하여 일정한 단계를 거쳐 궁극적인 삶인 아라한의 계위(階位)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인류 최초로 아라한이 되신 분이 석가모니 붓다인 것이다. 이는 대중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중부 또한 붓다를 신격화 하지 않았으며 수행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붓다의 입멸 후 붓다가 말씀하신 법의 체계를 5위(位) 75법(法)으로 정비한 후, 상좌부는 계율을 엄격히 해석하여 이를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으며,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대중부를 이루고 계율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해석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나눠진 뿌리이다.
나는 대중부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의 계율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대승불교가 기존의 불교사상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성불사상(成佛思想)을 내세운 것에 동의한다. 접근할 수 없었던 붓다의 영역을 모든 중생에게 개방하여 성불의 가능성을 주장한 것은 오늘날 한국의 불교문화에도 크게 자리를 잡았으며, 종교가 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던 밑바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3세기에서 후 7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교역이 크게 활발해지면서 인도의 신흥의 상공업 도시와 부유층이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불교의 후원자들로 국왕과 귀족, 그리고 신흥 상공업자 중심의 부유층들이 주를 이루고,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층이 확산되면서 대승불교(大乘佛敎, Mahayana Buddhism)가 더욱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처럼 종교가 전파가 되기 위해서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그들을 뒷받침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종교라는 것은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 마지막으로 도달할 궁극적 목표를 제시함과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를 믿음으로써, 혹은 가르침을 수행하며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가 시대와 맞지 않고 과거의 관습이나 특징에 머물러 있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과의 괴리감 때문에 사람들의 믿음에 의심이 생기고 이는 종교가 더 이상 전파되지 않는 상황까지 이르게 될 수 있다.
물론 시대가 흘러가더라도 변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지키고 수행해야 하는 계율들이 존재한다. 6바라밀(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般若), 삼취정계(三聚淨戒), 삼귀의계(三歸依戒)등은 불교를 수행함으로써 근본이 되는 내용이기에 중요하다. 하지만 붓다가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의 계를 다르게 한 것을 보았을 때, 붓다 또한 상황에 따라 계율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불교 상황을 고려한다면, 계율의 근본을 지키면서 상황에 따라 조금씩 바꿔야 한다는 견해가 더욱 필요하다. 현대의 사찰을 예로 설명해보면, 우리가 사찰을 생각하면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에 있는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현대의 물질문명이 발전하면서 도시에도 사찰이 건축되고 있다. 산지에 위치한 전통사찰은 횡적(橫的)으로 구성된데 비해 땅값이 비싼 도시사찰은 대체로 종적(縱的)으로 구성된다. 도시사찰은 현대식 건물 정상에 전각을 건립하여 사찰로서 종교적 상징성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인의 편리함을 추구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찰건축 공간구성은 지속과 변형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사찰의 구조는 갖추고 있지만, 붓다가 살아있었을 당시의 수행 공동체와 비교했을 때 현대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보고 사찰의 정체성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계율 또한 사찰과 마찬가지로 조금씩 바뀌더라고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종교란 어떤 사람에게는 안정감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희망을, 또는 자신의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람마다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든 그 바탕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상공업이 발달되며 사람들이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불교가 추구하는 정신이 인도의 사회가치관과 부합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빠르게 변화해 가고 있으며 종교 또한 이에 맞추어 지속적으로 변화를 해야 한다. 중생을 구제하고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도달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이지만 현재의 상황과 거리감이 있다면 언젠가 불교가 우리사회에서 모습을 감추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그들의 상황에 맞춰 계율을 변화시키고 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발전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수행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불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는 계율을 시대적 상황에 맞춰 변화시키는 것이 불교를 발전시키기 위해 추구해야 할 첫 번째 목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금강웹진] 권지훈 gjh1498@ggu.ac.kr